인사이트 3줄 요약
  • 감각은 단기 트렌드가 아니라, 기준·반복·시간을 통해 축적되는 경쟁력이다.

  • 오늘날의 브랜드는 제품을 파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제안하는 구조물에 가깝다.

  • 문화의 힘은 주목도가 아니라, 머무를 이유를 설계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감각의 설계자들을 읽고

최근 정말 인상깊게 읽었던 『감각의 설계자들』에 대한 감상을 커져가는 한국 문화의 힘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연결지어 개인적인 생각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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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양아 대표님이 책에서 브랜드와 공간, 도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분명하게 시사하신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깊게 다가왔다. 감각은 취향이나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을 통해 축적된 경쟁력이라는 점이다. 탁월한 브랜드와 장소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정한 기준을 유지하고, 반복적으로 선택하며, 쉽게 타협하지 않은 결과다. 이 과정이 길어질수록 진입 장벽은 높아지고, 그 감각은 모방이 아닌 자산이 된다. 유럽의 헤리티지 브랜드들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영향력을 펼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지점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이해’시키는 것

뉴욕에서 한식 파인다이닝 Atomix를 운영하는 박정은 대표님이 경희대 강연에서 자신을 “아토믹스라는 예술을 소개하는 큐레이터”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 표현은 한식이 더 이상 음식 자체로만 평가받는 단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 것 같았다.

Atomix가 제공하는 메뉴 설명 카드, 그리고 tofu 대신 dubu, soy sauce 대신 ganjang이라는 표기를 고집하는 선택은 단순한 브랜딩 디테일이 아니다. 이는 한국 문화가 더 이상 번역을 통해 소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이해를 전제로 제시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한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K-팝이 음악을 넘어 아이돌 트레이닝 시스템, 팬덤 네트워크 설계, 글로벌 유통 구조까지 포함한 하나의 산업 모델로 읽히듯, 한국 문화 전반이 점차 결과물이 아닌 설계 과정으로 주목받고 있다.


문화의 힘은 머무를 이유에서 나온다

다음은 내가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이다.

1) 에르곤 하우스

에르곤 하우스(Ergon House)는 이러한 설계 의도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책에서 소개된 에르곤 하우스 이야기는 읽자마자 영화 Eat Pray Love가 떠올랐다. 여행갈 때마다 비행기에서 즐겨보던 영화인데, 영화에서처럼 에르곤 하우스는 외부인에게 이국적인 문화를 깊숙히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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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곤 하우스가 특히 인상깊었던 이유는 이 공간은 호텔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핵심은 숙박이 아니라 식문화를 중심으로 한 체류 경험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고객의 체류 시간과 몰입도를 극대화함으로써 부가가치를 높여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에 기여하게끔 구조화했다. 식료품, 델리, 레스토랑, 바, 커뮤니티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방문객은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자에 가까운 위치에 놓인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적인 연출 뿐만 아니라, 체류 시간과 몰입도를 자연스럽게 늘리는 설계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어내 소비자로 하여금 가치 소비자로 소속되게 느끼도록 설계하는 그 정교함에 감동했다.


2) 위아오나

위아오나 이야기 부분에서 발견한 자크뮈스의 결혼식 테이블 장면은 내가 자크뮈스 인스타그램을 보고 그들의 일관된 라이프스타일과 브랜드 정체성에 빠져 자크뮈스라는 브랜드를 사랑하게 되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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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오나가 그들의 주요 무대로 삼을 도시를 선정할 때, 정서적 밀도의 여백을 살펴 도시를 선택한다고 한다. 책에서 언급된 이 ‘정서적 밀도의 여백’이라는 개념은 한국의 도시와 공간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한국의 빠른 속도와 밀집성은 분명 강한 경쟁력이지만, 동시에 감각이 축적되기 어려운 환경이기도 해서,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국은 정서적 밀도의 여백이 약한 편인 것 같다.

감각은 속도보다 반복과 여유 속에서 쌓인다. 한국의 완성도 높은 공간이나 팝업이 때로는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사회적으로 감정이 머무를 여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디자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도시와 문화가 감각을 수용하는 방식의 문제다. 책에서도 핵심은 문화적 성숙도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정서적 허용성, 공간에 대한 사회적 감도라고 했는데 이 말에 너무 공감이 되었다.


3) 데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

데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 파트 역시 굉장히 인상 깊게 남았다. 이 최초의 보이는 수장고는 문화가 성장하여 도시에 자리잡게 되는 또 다른 조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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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작품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존과 관리의 과정까지 공개함으로써 ‘관람객이 작품의 생애 주기에 잠시나마 동행하는 참여자가 된다’는 구절이었다. 예술이 소수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닌, 일상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체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들을 캡쳐할 수 있도록 '보이는 수장고'를 세계 최초로 설계한 MVRDV에게 문득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국에서 추진 중인 서리풀 수장고 프로젝트 역시 같은 방향성을 갖는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여러 시대에 걸쳐있는 작품들과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 교차하며 정서적 문화가 생겨나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문화의 확장은 이벤트나 콘텐츠 수 증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구조적 인프라가 생길 때, 감각은 축적되고 다음 산업으로 전이된다.


유행을 넘어, 일상으로

박정은 대표가 강조한 ‘한식은 유행이 아니라 세계인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문화 전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spotlight보다는 단단한 제작 환경일 것이다.

프랑스의 와인, 이탈리아의 올리브 오일, 일본의 스시가 그랬듯, 한국 문화 역시 특정 장르가 아니라 생활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도메인에 걸친 교육과 연구,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 그리고 시스템 개선과 같은 과제가 문화의 번영과 연결을 위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책을 읽으며 지속적으로 자라난 생각들이 있다.

소비자에게 있어서, 제품은 출발이 아니라 도착이다. 사람들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그 제품과 브랜드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브랜드 철학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하나의 브랜드를 점점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삶에 가까이 지니며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특히 ‘나다움’을 깊게 고민하는 사람일수록 브랜드를 가볍게 소비하지 않는다. 이들은 브랜드의 철학과 그 브랜드가 주고자하는 경험에 깊이 공감하고, 더욱 충성도 높은 고객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트렌드를 보더라도 이 흐름은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다움’을 정의하려 한다. 그리고 그 정의를 돕는 브랜드—자신의 철학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경험으로 설계할 수 있는 브랜드—가 더 많은 선택받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네스트 호텔과 글래드 호텔을 설계한 조수용님이 한 인터뷰에서 말한 ‘다음 세대는 질적인 기준 (성분, 원산지, 윤리적 의식)과 가치에서 타협하면 안 된다’는 포인트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브랜드가 제공하는 건 단지 실용과 편의가 아니라, 고객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실제로 존중해 반영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걸 지속적으로 지키는 곳만이 앞으로도 선택받는다.

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의 조각들이 조립되기 전에 그토록 호텔을 만들고 싶었던 이유를 비로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호텔이나 리조트에 머무는 경험이 호스피탈리티의 궁극적 형태로 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지역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호텔에 묵을 때, 개인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감정으로 인해 본인의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을 자고, 씻고, 아침을 먹고, 공간의 온도를 느끼며 빛과 소리를 따라가다보면, 사람은 그 장소의 가치관과 철학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고로 숙박은 가장 긴 시간 동안, 가장 많은 감각을 통해 그 장소의 철학을 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 문화의 일상적 가치를 극대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 브랜드와 그 브랜드 철학을 함께 만들어가는데 기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