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랜드 셀렉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드타임, 생산 안정성, 규제 대응 능력이다.
- 하이엔드 시장일수록 수요 예측 실패의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 경험 중심 비즈니스는 감각과 동시에 오퍼레이션 설계 역량을 요구한다.
Part 1 — 해외 홈데코 브랜드 플랫폼을 시작하기까지
나는 호스피탈리티 업계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호텔과 F&B 업계에서 최고의 경험을 설계하는 기업들을 보며 늘 큰 감동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호텔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공간이 아니다. 그 지역의 문화, 자연, 음식, 사람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경험하게 만드는 장소다. 그 경험을 통해 누군가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깨닫게 된다고 믿는다.
언젠가 나도 그런 경험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 궁극적으로는 호텔 개발에 기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텔을 만드는 것은 훨씬 복잡한 일이다. 게다가 좋은 경험을 설계하는 것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가 되기 어렵다. 특히 럭셔리 호스피탈리티 비즈니스와 연결된 호텔 개발의 본질은 결국 부동산 가치 상승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경험은 디테일에서 시작된다
내가 그동안 호텔에 머물면서 감동했던 포인트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부터 생각해보았다. 화려한 건축과 인테리어, 실력 있는 셰프의 음식도 있지만 결국 나를 몰입하게 만든 건 아주 사소한 디테일들이었다.
라운지나 로비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향, 온도와 조도, 룸 안의 가구 배치, 손에 닿는 촉감, 다이닝 공간의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세팅된 식기와 정확한 타이밍에 서빙되는 음식 등 무엇하나 거슬리지 않도록 설계된 모든 것들이 항상 감동을 주는 요소들이었다. 이 디테일들은 뭔가를 더하는 게 아니라, 불편함을 하나씩 제거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더 만들기 어렵다.
그들은 무엇에 집착할까?
그렇게 질문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 포시즌스, 리츠칼튼 같은 하이엔드 호텔 브랜드들은 어떤 가구와 기물을 사용할까?
- 이 브랜드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될까?
- 호텔과 브랜드는 어디에서, 어떻게 연결될까?
런던 포시즌스에서 근무하던 친구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된 하이엔드 호텔들은 테이블웨어, 어매니티, 가구 브랜드와 이미 20년 이상 장기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로얄 코펜하겐, 베르나르도 같은 브랜드들이 대표적이었다.
그 순간 생각했다. 새로운 호텔을 짓는다면 이 브랜드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지? 그리고 여기서 Verdore의 아이디어가 시작됐다.
초기의 목표는 단순했다. 언젠가 호텔에 들어갈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자.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런 레퍼런스도 없는 내가 대형 호텔 브랜드를 상대로 세일즈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먼저 장사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브랜드를 직접 수입하고, 시장에 반응을 만들고, 내 안목과 경험을 증명하자.
그렇게 2023년 5월, 뭐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사업자등록부터 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온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첫번째 브랜드가 바로 프랑스의 핸드메이드 세라믹 브랜드, INI Ceramique였다.

Part 2 — 콜드 컨택부터 백화점 입점까지
INI Ceramique와 함께한 0 to 1의 기록
INI Ceramique는 프랑스의 1인 작가가 만드는 핸드메이드 세라믹 브랜드다. 유럽에서는 이미 꽤 알려져 있었지만, 한국에는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콜드메일로 사업 제안서를 보냈고, 운 좋게도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수입원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전통 문양이 새겨진 독특한 베이스 디자인은 내가 독점 수입으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계약서조차 처음 써보는 상황이었지만, 해외 소싱 온라인 강의와 자료를 참고해 엉성하게나마 직접 만들어 진행했다.
자본 300만 원, 무지에서 시작한 수입 비즈니스
초기 자본 300만원을 전부 제품 매입에 썼다. 화병 40개도 못 사는 금액이었다. 소량 수입을 받아주는 곳을 찾다 개인사업자 규모도 대응해주는 통관 업체를 통해 첫 수입을 진행했는데, 통관 비용만 매입가의 50%가 들었다. (세금 제외) 지금 생각하면 충격적일만큼 무모했지만,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첫 샘플들을 들여오자마자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사진 몇 장을 포함한 컨텐츠들을 올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2주도 채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메종 마리끌레르 매거진에서 INI Ceramique 제품 중 내가 독점으로 수입한 전통 양식의 화병을 게재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급하게 홈페이지를 만들고, 인스타그램에서는 인터뷰와 브랜드 스토리 컨텐츠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여러 온라인 플랫폼들로부터 입점 제안도 물밀 듯 밀려와, 그 중 오늘의집, LF몰, CAVA LIFE 등에 입점했지만, 수수료 구조가 부담돼 주력 채널은 자체몰 + 인스타그램으로 가져갔다.
그러던 중 현대백화점 HBYH에서 브랜드 입점 제안이 왔다.
택시 타고 샘플 들고 간 첫 바이어 미팅
당시 차가 없던 나는 묵직한 도자기 화병 6개가 담긴 커다란 샘플 박스를 들고 택시를 타고 현대백화점 본사 건물로 향했다.
첫 미팅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대표님이 너무 어려 보이시네요.” …, “설마 이게 본업은 아니시죠?”
당시 나는 개발자로 재직 중이었지만 괜히 지고 들어가기 싫어서 본업이라고 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압구정 본점 리뉴얼 오픈 시기에 맞춰 입점했고, 고객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이후 판교, 목동, 대구점까지 총 4개 지점으로 확장 입점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리드타임이었다. 다음 재고 발주를 넣었는데 제작에만 2~3개월, 해상 운송 + 통관에는 3개월로 거의 6개월의 대기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INI Ceramqiue은 1인 작업 브랜드라 화병 10개를 작업하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린다. 게다가 제품 특성상 빠르게 소모되는 상품도 아니었다. 객단가는 30~40만 원 정도에 실용성도 거의 없는 관상용에 가까운 홈데코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너무 아름답고 대체불가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나는 기다리는 선택을 했다.
이후 해당 브랜드의 신제품 라인 수입을 고민하던 시점에 나는 결국 다시 수입 통관 비용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통관비를 1/5로 줄이다
여러 방법을 찾다 INI Ceramique가 최근 홍콩에도 제품을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사용했던 유럽 브랜드 도매 플랫폼을 알게됐다.
당시 홍콩의 신생 스타트업이었는데, 홍콩에 있는 소매 비즈니스들을 대상으로 유럽의 홈/리빙/주방용품 브랜드를 중개 & 수입통관까지 대행해주는 서비스였다. 한국에는 서비스하지 않았지만, 일단 무작정 컨택해 한국 수입 통관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정말 운 좋게도 그들은 내 제안을 빠르게 승낙했고, 한국 시장을 나를 통해 테스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 후로 나는 총 수입 통관 비용을 1/5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Tableware 라인 출시 협업
당시 INI Ceramique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나는, 지금 돌아보면 꽤 무모할 정도로 당당했다. INI Ceramique 측에 Verdore (우리 브랜드)의 이름을 건 새로운 테이블웨어 라인을 협업 출시하자는 제안을 직접 했다. 제작비 이슈로 인해 최종 양산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아이디어 단계부터 프로토타입 제작, 그리고 최종 결과물 도출까지의 과정을 직접 디렉팅했다.
당시 내가 그리고 있던 Verdore의 방향성은 절제된 미학과 감성을 바탕으로, 감도 높은 홈데코 오브제들을 큐레이션하는 브랜드였다. 이 방향성을 바탕으로, 작가님께 Verdore의 감성과 INI Ceramique 특유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섞인 새로운 디자인을 제안했다.


INI Ceramique는 지중해적인 무드, 과감한 붓터치, 이국적인 색감이 강점인 브랜드다. 반면 한국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는 지점은, stoneware ceramic 소재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질감과 차분한 인상, 그리고 과감하지만 절제된 드로잉이 만들어내는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이 공통점을 중심으로 수차례의 프로토타입을 테스트하며 직접 피드백을 주고받았고, 점진적으로 작업물을 발전시켜 최종 라인 후보까지 선정했다.
아쉽게도 제작비와 인건비 문제로 인해 해당 프로젝트는 양산 단계에서 중단되었다. 당시의 나는 이 라인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자본도 부족했고, 제작 이후의 생산 안정성, 유통 구조, 그리고 재고 리스크까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현대백화점 HBYH 바이어와의 관계도 좋은 편이어서, 선임 바이어에게 사전 공유 차원에서 해당 테이블웨어 샘플을 보여드렸고,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전시 및 프로모션을 함께 진행하겠다는 제안도 받을 수 있었던 꽤 의미있는 프로젝트였다.
두 번째 브랜드, 그리고 법의 벽
확장 타이밍에 알렉산더 맥퀸 출신 디자이너가 만든 캔들 & 테이블웨어 브랜드 Lauren Dickinson Clarke를 발견했고, 고민 없이 바로 샘플을 주문했다.


문제는 캔들이 안전확인대상 생활화학제품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로 무지성으로 수입을 결정했던 것이다.
시험, 인증, 신고, 스티커 부착까지 절차는 길고 비용은 컸다. 시험용으로 폐기된 새 제품 값과 전체 시험 기간에 들인 돈만 수백만 원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진행했고, 결국 현대백화점에 추가 입점까지 성공했다. 캔들은 확실히 더 잘 팔렸다.
하지만 재앙은 연속으로 찾아왔다. Lauren Dickinson Clarke의 생산 공장 화재로 생산 중단되어 수출이 더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뒤늦게 받았다.
와중에 악재가 겹쳐 INI Ceramique은 유럽 내 수요 증가로 인해 아시아 수출을 중단하기로 했다. 단 두 개의 브랜드에 집중했던 나는 순식간에 선택지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남은 재고를 안고 백화점에서도 모두 철수했다.
이 모든게 단 1년 반만에 일어난 일들이다.
사업을 접으며
이 프로젝트는 수익적으로는 완전한 실패였다. 첫 사회생활에서 모은 자본금도 모두 썼다. 하지만 지금 돌아봐도 그 때의 기억과 에너지가 생생할 만큼 진심을 다해 임했다.
호텔을 만들 수는 없었지만, 호텔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사람의 손에 닿는 기물,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오브제,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을 직접 설계해볼 수 있는 귀중한 프로젝트였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한 가지를 아주 분명하게 알게 됐다. 내가 진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제품을 팔아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를 고민하고 설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Verdore는 결과적으로 홈데코 브랜드를 수입하는 비즈니스였지만, 내게는 호스피탈리티를 가장 낮은 해상도에서 실험해본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덕분에 어떤 디테일이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지, 그리고 어떤 선택들이 경험의 밀도를 높이는지, 그리고 이 점들을 엮어 굴러가는 비즈니스가 되게 하려면 어떤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에 다시 도전한다면 취향과 맥락이 아주 정교하게 큐레이션된 호스피탈리티 경험을 설계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호텔일 수도 있고, 다른 구체적인 공간일 수도 있고, 어쩌면 플랫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유저/고객이 그 안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기억을 가져가는가다. Verdore는 그 질문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끝까지 밀어붙여본, 아주 개인적이고도 현실적인 첫 실험이었다.